한 시대를 풍미했던 넷북이 요즘 들어 인기가 시들하다. 성장률은 일찍이 멈췄고 판매율은 1년 전 동기 대비 32%나 줄었다. 업무용 PC 부문에서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지만, 소비재 시장에서 판매율이 뚝 떨어지면서 그동안 쌓아놨던 점유율도 갉아먹고 있다. 지난 분기 전체적인 PC 시장의 성장률도 둔해지는 데 한몫했지만, 넷북의 이같은 상황을 보면서 누구보다 긴장해야 할 인텔은 별다른 걱정을 하고 있지 않다. 넷북 제품군을 만들어 시장을 주도해왔던 것이 다름 아닌 인텔이건만 지난 2분기 아톰 판매량이 2010년 동기에 비해 무려 15%나 떨어져도 크게 낙심하는 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담담하게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는 인텔의 속셈은 무엇일까?

애초부터 넷북 확대는 생각 안 했던 인텔

인텔은 실리콘 기업 중에서 가장 마케팅을 잘하는 기업 중 하나다. 소비자가 필요로 하는 제품만 내놓는 게 아니라 그 제품이 왜 필요한지 잘 설득하는 기업이라는 것이다. 블루맨을 동원한 인텔 인사이드 캠페인부터 소녀시대를 앞세운 2세대 코어 프로세서 마케팅까지 인텔의 프로세서를 기억하고 제품의 구매를 유도하는 기술에 있어선 도가 튼 기업이다.


그런데 유독 마케팅을 하지 않은 제품군이 있다. 그것이 아톰 프로세서와 넷북, 넷톱이다. 2008년 3월 인텔은 넷북과 넷톱이라는 제품군을 공식 발표했지만, 이 제품군에 대한 대규모 마케팅은 한 적이 없고, 인텔 광고 프로그램도 적용하지 않았다. 넷북이 활황기던 때 인텔 코리아의 마케팅 관계자는 "인텔은 절대 넷북과 관련한 마케팅을 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이 제품은 어디까지나 인터넷 전용의 세컨드 PC"라고 말한 적이 있다. 넷북만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인텔이 횡재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많았음에도 이 인텔 관계자는 뜻하지 않은 인기에 오히려 당황했다. 값 싼 넷북이 인기를 모을 수록 인텔의 수익 구조를 흔들 수도 있었기에 넷북 만큼은 명확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는 인텔의 입장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인텔은 넷북에 대한 공격적 전략이 아니라 방어적 전략을 택했다. 인터넷이라는 목적성만 충실하게끔 성능을 억제한 것이다. 가벼움과 인터넷 연결성을 맛본 이용자들은 더 나은 성능의 넷북을 원했지만, 인텔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처음 나왔던 넷북과 지금 나온 넷북을 비교해보면 성능이 크게 나아지지 않은 것도 이에 기인한다. 매년 그럴 싸한 아톰 로드맵을 공개했으나 인텔은 넷북 시장을 키울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기대 이상의 몫을 했다

그렇다고 인텔이나 PC 기업에게 넷북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세계 경제가 휘청하며 PC 시장의 역성장이 예상 되던 때 PC시장을 견인했던 것이 다름아닌 넷북이었다. 인터넷 중심의 장치면서도 PC의 사용성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값싼 휴대 장치였던 터라 지출을 줄여야 했던 기업과 개인에게 넷북은 큰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인텔의 PC 부문 매출이 감소하지 않도록 방어하는 데 좋은 재료가 됐고, 지난 해 컴퓨텍스 까지 상당 수의 넷북 제품을 전시하면서 세를 유지하려고 했다.

비록 인텔이 넷북을 위한 마케팅을 하지 않았지만 대량 구매에 따른 탄력적인 가격 정책을 편 덕분에 몇몇 업체는 공격적인 넷북 사업을 펼쳤다. 이때 넷북 비즈니스로 성장한 대표적인 예가 에이서다. 에이서는 북미와 유럽/중동/아프리카(EMEA)에서 저가 넷북을 앞세운 공격적 전략을 편 덕에 2010년을 전후로 HP에 이어 세계 2위 PC 업체로 도약할 수 있었다. 에이서가 넷북의 출구 전략을 잘못 세우는 바람에 지난 2분기 다시 4위 업체로 내려 앉았지만, 에이서에게 넷북은 기대 이상의 몫을 해냈다.

넷북은 크롬북으로 옮긴다

인텔은 넷북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은 안하지만, 그래도 그 같은 제품군이 사라지는 것은 막고자 한다. 지금 넷북은 250불 전후에도 판매되는 확실히 값싼 제품으로 전락한 상황이긴 하나 이 같은 장치를 소비해야 할 곳은 아직 있기 때문이다. 인텔이 넷북 제품군을 발표했을 때의 지향점은 PC가 보급된 나라의 세컨드 PC와 더불어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저개발 국가에 PC를 보급해 전체적인 PC 수요를 늘리는 것이었는데 엉뚱하게도 IT가 발전한 나라에서 수요가 폭발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텔은 IT가 잘 발달한 나라에 맞는 변형된 넷북을 시도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넷북 구매자들이 세컨드 PC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에 따라 그 목적성을 더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구글 크롬북이다. 크롬 OS를 얹은 크롬북은 인터넷을 목적으로 하는 넷북의 존재 이유를 그대로 담고 있으면서도 과도한 처리 성능을 요구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 클라우드에서 작업을 처리하고 데이터를 저장하는 크롬북이야말로 처리 성능이 낮은 아톰과 매우 잘 어울리는 조합이 될 수 있다. 실제로 판매되는 구글 크롬북은 넷북과 다른 것이 거의 없다. 저장 공간과 화면 해상도만 빼면 넷북 폼팩터를 그대로 옮겨왔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구글의 제품군에 인텔이 스스로 편입을 자처했다는 점이다. 이는 특정 제품군을 주도하며 산업을 일궈온 인텔의 스타일이 아니다. 분명 넷북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넷북 같은 제품군을 더 이상 주도할 뜻이 없음을 보여주는 의사 표시이기도 한 것이다. 어차피 크롬북 생태계를 이끌고 갈 구글을 통해 크롬북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면, 인텔은 더 이상 넷북을 두고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 단순히 시장에 필요한 칩 공급자의 역할만 충실하면 그만이기에 저가 제품군 시장을 유지하는 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결국 넷북을 없애는 한편으로는 아톰의 살 길을 찾는 인텔. 참 영리, 아니 영악하지 아니한가.

Writer profile
author image
안녕하세요. 칫솔(chitsol)입니다. 지난 2006년부터 PC와 업계 안팎의 이야기를 나름의 시각으로 풀어냈던 '초이의 IT 휴게실'을 운영하면서, 동시에 플레이피씨의 블로그 칼럼니스트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플레이피씨라는 PC 전문 블로그 미디어에 맞게 보다 전문적으로 편안한 읽을 거리를 전하는 이야기꾼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블로그: http://www.chitsol.com/
e-메일 : chitsol@playthepc.com
twitter : chitsol

트랙백 주소 : http://playthepc.com/trackback/2146

< 1 2 3 4 5 ... 61 >